구기정 개인전 《Contrology》 전시 비평글
비평 : 황재민
아주 미세한 이질감의 배치 – 《Contrology》라는 조절학
1. 각성 혹은 잠듦
파리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Paris), 혹은 그냥 드니(Denis)라고 불리는 성인이 있다. 그는 약 3세기쯤 생존한 인물로, 고대 로마 시기에 루테티아(Lutetia), 지금은 파리로 불리는 곳에서 포교 활동을 펼치다 박해받았다. 드니 성인은 참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기적이 벌어졌다. 그가 잘려 나간 자기 머리를 양손에 들고 일어나 걸었던 것이다. 드니 성인은 이 기적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랐고 이후 여러 성상에서 머리를 양손에 들고 있는 특유의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미셸 세르(Michel Serres, 1930-2019)는 디지털 미디어가 보편화된 오늘날을 드니 성인의 시대라고 칭한다. 그러니까,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젊은 세대’는, 곧 자신의 머리를 양손에 든 변조된 신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머리가 어깨 위에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양손 위에 있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세르는 변조된 신체를 가진 스마트폰 세대가 기적적인 시대를 일궈낼 것이라 말한다. 그들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혼돈을 만들어낼 것이며, 이윽고 지식 시대의 종말을 이끌어내리라고 말이다. 머리 없는 익명의 드니 성인(들)은 머리 있는 자들이 설계했던 지식 생산의 기반 조건을 재배치할 것이며, 혁명을 조직하고 완전히 새로운 정치 쟁의를 개발해낼 것이며, 마침내 “군대에 평화를 선사한다.”1 그들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통치성을 분쇄하고, 수면제 중독에 시달리며 잠들어 있던 자들을 각성시킨다.2
조금 황당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낙관론은 스마트폰 세대가 갈수록 퇴화하는 인류사의 말단이라는 냉소주의에 적극적으로 맞선다. 스마트폰 세대와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양식이 아무리 멍청하고 난잡하게 보이더라도, 그건 기껏해야 ‘머리 있는 자’들의 시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식 생산과 정보 처리의 주권이 어깨 위 머리로부터 양손으로 재배치되는 순간, 통제 사회(the Societies of Control)로부터 탈주선을 그릴 수 있는 지식의 재배치 역시 동반된다. 그렇지 않겠는가? 아직 낙담은 이르다.
세르의 활기찬 서술에 있어, 각성은 중요한 모티브다. 그러나 각성으로부터 느닷없는 혁명의 가능성이 아닌, 음울하리만치 비관적인 뒷면을 읽어내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 이를테면 조너선 크래리(Jonathan Crary, 1951-)는 각성 상태가 잠듦의 미명을 벗어나는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동시대인이 항구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유독한 일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24시간 내내 통신망을 경유해 연결되어 있고, 삶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와 장소가 디지털 이미지 혹은 정보 등으로 기록되고 저장되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비-시간이 삶의 모든 국면을 잠식한 뒤, 어떠한 정보도 생산하지 않을 수 있는 여분의 시간, 휴식과 잠의 시간은 무용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평가절하 당한다. 전자화된 삶이 강요하는 빠른 속도는 계속해서 불면을 권유하고, 이는 곧 내적 자아의 절대적인 침묵으로 이어진다. 세르와는 달리, 크래리는 항구적인 각성 상태와 강제적인 불면으로부터 지각 경험의 동질화/동기화(synchronization), 인간 경험의 표준화, 또한 주체적 동일성 및 특이성의 상실을 짚어낸다.3 이때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각성이 아니라 잠듦이다. 불면과 각성을 주입하는 파국적 시대의 바깥을 상상하기 위해, 꿈을 배양할 수 있는 급진적 단절로서의 잠듦이 필요하다.4
세르와 크래리의 상이한 시대 인식은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불투명한 이행기에 주어지는 모순된 주석이다. 하나의 시대를 바탕으로 한 이토록 양가적인 펼침면은 ‘오늘’을 틀짓고 사유하는 것이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거한다. 각성인가, 혹은 잠듦인가? 무기력한 미명 속을 시급히 벗어나야 하는가, 혹은 어둠 속에 머무르며 상상과 감각을 회복할 수 있는 일시 정지 상태를 찾아야 하는가? 정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2. 장치의 ‘조절학(Contrology)’
구기정의 전시, 《Contrology》(2022)는 미디어 환경의 변환과 그에 따른 인간 신체 및 정신의 변환을 추적한다. 전시에는 총 3개의 작업이 놓였고, 전부 스크린이 포함되어 있었다. 개 중 〈Contrology〉(2022), 그리고 〈Coagulation〉(2022)과 같은 작업에는 스크린과 함께 구조물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 장치는 작업 내부로 진입한 관객의 신체가 움직이게끔 강제하고, 동시에 그 움직임의 가동 범위를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Contrology》는 스크린과 인간이 맺는 물질적 조건을 임의적으로 조작하며 관객의 신체를 의도치 못한 방향으로 유동시키는데, 이것은 ‘오늘’의 미디어 환경이 작동하는 비가시적 통제의 양상을 모사하는 듯했다.
기술은 망각을 자신의 원리 중 하나로 갖는다. 이를테면, 스마트폰 사용자 중 매 순간 디바이스의 무게를 구체적으로 감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망각이라는 조건은 사용자와 모순적인 관계를 맺는다. 정작 기술 그 자체는 투명한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용자가 기술 장치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망각할 때, 그는 장치 이면에서 작동하는 모종의 이데올로기를 수행하게 된다. 이를테면 크래리가 말했듯이, “테크놀로지적 인터페이스가 편재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사용자들이 더 능수능란하고 숙련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분투하도록 이끈다.”5 그렇다면 인간이 스크린과 맺는 접면의 물질적 조건을 재사유하는 것은, ‘오늘’의 추적을 위해 긴요하다. 《Contrology》의 경우에서처럼.
그러나 여기엔 아직 해소되지 않은 모순점이 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미디어는 성공적으로 제작될수록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만다. 이때 스크린과 인간의 관계를 자의적으로 매개한다는 것은, 어쩌면 장치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의 환영을 단순히 재생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지속적으로 은폐되는 기술의 환영적 성격을 끄집어내어 성찰하기 위해선, 내부의 재조직이 아닌 외부의 침입이 필요한 것 아닐까? 그러나 《Contrology》의 장치들은, 미디어의 테크놀로지적 인터페이스가 갖는 환영적 성격을 적극 수행하는 한편, 동시에 아주 미세한 이질감을 기입하는 양가적인 역할을 한다. 전시에서, 관객은 공간에 놓인 구조물에 몸을 맡기고, 스크린을 체험하며, 모종의 불편함과 이질감을 천천히 감각하게 된다. 이 이질감은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인식과 감각의 향방을 재조정한다. 전시는 인간이 스크린 바깥으로 완전히 탈출하거나, 스크린 내부로 완전히 사라지는 종류의 사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인간이 스크린과 맺는 필연적 매개를 직시하고 나아가 재사유하기를 권한다. 온전한 각성, 혹은 온전한 잠듦이라는 극단의 선택지 중 한 축으로 기울어지기보다는 양가적 선택지를 포괄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한다.
3. 〈Contrology〉와 〈Coagulation〉의 경우: 미세한 이질감의 배치
그렇다면 작업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전시된 작업은 무엇보다도 ‘잘’ 만들어져 있는데, 스테인리스 구조물의 글로시한 표면, 연극 무대처럼 감각적으로 조절된 조도, 그리고 스크린의 말끔한 물성 등이 합쳐져 그런 인상을 준다. 언뜻 보면 SF 영화의 세트장이라거나 혹은 (그것이 무슨 제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 출시된 제품의 시연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설치는 보는 이가 마음을 놓고 장치에 신체를 내맡기게 하는 외적 요소가 된다.
〈Contrology〉의 경우, 구성은 다음과 같다. 2개의 커브드 모니터가 아래로 살짝 기울어진 채 설치되었고, 곡선으로 휘어진 스테인리스 구조물이 모니터를 지지하고 있다. 스크린, 그러니까 모니터를 보기 위해서 관객은 이 구조물에 앉아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뭔가 문제가 발생한다. 구조물이 애매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고, 또 조금 딱딱하기 때문에, 자리에 앉은 관객은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비뚤어지게 되는 것이다. 〈Contrology〉는 분명 즐거운 안락함이 아니라 불편함과 이질감을 주고 있는데, 그 와중 스크린에서는 퍼포머가 등장, 구조물을 이용해 능숙하게 몸을 이완하고 운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크린 속 퍼포머가 구조물을 활용하는 숙련된 모습은 관객이 구조물이 맺고 있는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와는 상이하다. 몸을 편하게 쉴 수 없는 이질적 환경 속에서, 관객은 매끄럽고 일상적인 몰입의 상태를 체험하는 게 아니라 특정 구조물 위에 위치 지어져 있는 자신의 상태를 계속해서 되새기게 된다.
전시와 작업의 공통 제목인 “컨트롤로지(Contrology)”에는 단서가 있다. 전시 서문에 따르면, “컨트롤로지”는 필라테스 운동의 창시자 조셉 필라테스(Joseph Hubertus Pilates, 1883-1967)가 명명한 개념이다.6 조셉 필라테스는 이 “컨트롤로지”, 즉 ‘조절학’을 통해, “문명인의 자질인 몸과 마음의 완전한 균형”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질병과 불행이란 정글”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근육 운동을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나아가 습관을 조절하여, 완벽한 신체와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7
조셉 필라테스는 이와 같은 ‘조절학’을 1차 세계 대전 당시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에 체류 중이었던 그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수감 되었는데, 수감 상태에서 건강을 돌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던 중 수용소 침대 등을 이용한 운동 방법을 생각했고, 이는 곧 필라테스라는 운동법의 바탕이 되었다.8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은 《Contrology》라는 전시/작업의 이름에 흥미로운 뉘앙스를 덧댄다. 수용소, 그러니까 감옥과 같은 규율 기관이 정신, 나아가 신체를 통치하던 규율 사회(disciplinary societies)의 끄트머리에서, 조셉 필라테스는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 조절과 수양의 방법을 창시해냈다. 그렇다면 규율 사회 이후, 컴퓨터라는 기계가 보편화된 이후의 통제 사회에서, 자기 조절과 수양은 어떤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여기서 잠시 통제 사회라는 시대 구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1990년 발표한 짧은 글 「통제 사회에 대하여(les sociétés de contrôle)」에서, “제3의 기계들, 즉 정보 기기와 컴퓨터 등을 통하여 작동”하는 통제 사회가 규율 사회를 대체하며 등장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통제 사회는 “변조(modulation), 즉 순간순간 스스로 변하는 주형, 혹은 이리저리 변형될 수 있는 그물과 같은 것”으로, “암호와 같은 숫자”들에 의해 작동하며 포괄적이고 초안정적으로 공존하는 “한없는 지연”을 만들어낸다. 이 지연 속에서 인간은 무한한 순환을 통해 철저하게 나누어지며, ‘우리’로의 집산이 불가능해진다.9
들뢰즈의 선구적인 통찰은 정보 기기가 컴퓨터 이상으로 확장되어버린 오늘날에도 얼마간 유효하다. 특히 “암호와 같은 숫자들”,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 1943-2011)가 모든 차원을 영차원으로 압축해버리는 실재계의 연산 기술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했던 디지털 미디어 특유의 정보 처리 능력에 대한 성찰은 특히 필요하다.10 이제 동시대인은 이른바 ‘알고리즘 통치성(algorthmic governmentality)’의 시대, 삶과 사회적 관계가 모두 연산 가능한 코드로 전환되어 전적으로 데이터화된 시대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데이터화된 ‘자기’들이 알고리즘의 블랙박스 안에 밀폐되어버린다는 점, 체화된(embodied) 개인의 실존하는 잠재성이 연산 과정에서 실종되어버리는 동안 오직 통계화된 개인만이 주체로 기능하기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11 오늘날 유일한 집산은 통계적 집산일 따름이고, 이는 측정 불가능한 무엇으로 여겨지는 인간 고유의 감각, 신체 등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시 한번 크래리를 인용하자면, 그는 테크놀로지 인터페이스와 알고리즘의 개입 이후 인간의 눈이 광학의 영역에서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안구”라는 용어는 인간의 시각을 외부의 지시나 자극에 종속될 수 있는 운동 활동으로 재배치한다.” 이제 눈은, “전자적 유인에 대한 신체 운동 반응이 그 최종 결과가 되는 어떤 회로의 매개요소로 변환된다.”12 과거 인간의 눈이 세계를 감각하는 자율적 기관으로써 판단의 기능을 수행했다면, 오늘날 눈이란 포착한 시각 이미지를 전산 회로에 연산 가능한 형태로 기입하기 위한 미가공 데이터의 생산 장치가 된다. 여기선 오직 연산 가능한 신체만이 신체라고 불릴 수 있으며, 연산 가능한 움직임만이 움직임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이와 같은 배경을 고려한 채 〈Contrology〉, 그리고 작업에 내재된 미세한 이질감을 떠올려보는 것은 흥미롭다. 〈Contrology〉는 스크린 앞에 놓인 신체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행동,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는 모범적 행동으로부터 빗겨날 수 있는 움직임을 기획한다. 〈Contrology〉는 예외적 움직임의 산출을 통해 관객의 신체를 교란하는데, 이것은 동시에 신체 움직임을 채집하려는 전자 회로를 교란하는 움직임이며, 신체를 하나의 변수로 전환하여 연산 불가능한 움직임을 생산하려는 탐구다. 작업은 미세하고 내재적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신체에 예외적 움직임을 기입하며 새로운 ‘조절학’의 가능성을 그린다. 그것은 몸과 마음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건강한 움직임이 아니라, 예외적이고 단절적인 불균형을 도모하기 위해 신체의 잠재성을 복원하려는 이질적인 움직임이다.
그러나 〈Contrology〉에 가까이 놓인 〈Coagulation〉로 향하자면, 의문이 생겨난다. 여기서부터 신체의 움직임과 그 가능성이 돌연 사라진 탓이다. ‘응고’를 뜻하는 〈Coagulation〉에서 관객은 움직이기를 멈추고, 곡선형 스테인리스 구조물에 가만히 기대어 스크린을 바라볼 것을 권유받는다. 꽤 크게 펼쳐진 스크린 앞에는 풀과 흙이 원형으로 깔려 있고, 관객은 구조물 위에 걸터앉거나 등을 기대며 앉는 등, 비교적 편안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마침 눈앞의 스크린에서는 숲, 바위, 이끼, 혹은 이 모든 것이거나 그 어떤 것도 아닌 이미지가 끊임없이 움직이며 영사되고 있기에, 〈Coagulation〉에서는 마치 정원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그러므로 위험한 몰입의 장소를 경험할 수 있다.
어떤 맥락에서 살펴보나, 몰입으로부터 비판을 찾아내긴 어렵다. 몰입은 연극, 영화, TV, 그리고 가상현실까지, 매체가 전환되고 발전해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인간적’ 관성이다. 소파에 앉아 스크린의 불빛을 멍하니 쳐다보는 누군가 혹은 길거리를 거닐며 시야를 스마트폰에 고정시킨 누군가를 떠올려 본다. 몰입은 수동적인 것, 나아가 무기력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전시는 〈Coagulation〉에 가정된 바라봄의 상태를 ‘몰입-딜레마’라고 규정한다. 스크린에서 유동하고 있는 이미지는 사실 혼동을 일으키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작가는 〈Coagulation〉에서, “실존하는 이미지인지 혹은 디지털로 생산된 이미지인지에 대한 교란”, 그리고 “이미지를 아주 느리게 동작시키며 (…) 의심하는 시선과 의심을 거두기 위한 집중”,13 이와 같은 두 가지 요소를 염두에 두었다고 말한 바 있다. 〈Contrology〉가 신체의 움직임에 미세한 이질감을 기입하고자 했다면, 〈Coagulation〉는 안구의 작용과 이미지의 인식에 미세한 이질감을 기입한다.
‘몰입-딜레마’의 구현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이라면, 아마도 딜레마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몰입 상태를 요구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딜레마의 모순적 상태가 과연 몰입을 이겨낼 수 있을까? 몰입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 아닐까? 그러나 여기서 ‘몰입-딜레마’의 필요 조건으로 주어진 몰입 상태를, 앞서 말한 잠듦, 통제 사회의 “한없는 지연”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급진적인 단절로서의 잠듦과 겹쳐볼 수 있을 것이다. 몰입은 무비판적인 유희의 상태인 동시에,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상태, 집중하는 상태, 결과적으로 (언젠가 완전히 잊어버릴지라도) 이미지에 대해 더 잘 아는 상태를 유도하기도 한다. 끝없는 몰입은 무기력의 미명 속으로 계속해서 침잠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어쩌면 이미지의 보다 정치한 파악을 가능케 하는 잉여 시간의 형성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이를테면 미디어 이론가 텅-후이 후(Tung-Hui hu)는 끝없이 스마트폰을 붙잡고 몰입하는 ‘무기력증(lethargy)’ 상태를 하나의 단절적 힘으로 재사유하고자 했다. 그는 계속되는 스크롤링으로 마비되어 버린 신체와 정신을 병리적 상태로 간주하는 대신, 창조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거대한 잠재성의 영역이자 디지털 자본주의(digital capitalism)가 투여하는 주체화의 서사를 끊어낼 수 있는 부정성의 힘으로 치환할 것을 제안한다.14 〈Coagulation〉 역시 몰입을 단순히 소모적인 시간이 아닌, 이질성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잠재적 시간으로 향하는 문턱으로 다룬다. 이것은 또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Coagulation〉의 딜레마에 대해, 한 겹의 맥락을 덧붙일 수 있다. 작가는 〈Coagulation〉에서 “실존하는 이미지인지 디지털로 생산된 이미지인지”15 혼동되는, 자연의 것인지 인공의 것인지 판단하기 까다로운 이미지를 제작했다. 이 이미지는 화면 속에서 멈춤 없이 유동하면서 몰입을 유도했는데, 언뜻 보면 생성적 인공지능(generative AI)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렌더링 중인 망델브로 집합적 자연, “실재계를 디지털화하는 상징적 구조를 연산”16한 결과처럼 보였다. 그러나 〈Coagulation〉의 이미지는 실제 자연을 촬영한 뒤 3D 모델링을 거쳐 변형한 것으로, 이와 같은 제작법은 이미지의 정체에 대한 혼동을 만드는 환영적 기술이기도 했다. 다만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작가는 생성적 인공지능을 활용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며 전력 소비의 문제를 거론했는데, 인공지능을 구동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전력이 소비되기에 이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17 여기서 〈Coagulation〉의 이미지 제작 방식은 단순히 효율성을 고려한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작업의 방법론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로 취급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여러 취재에 따르면, 생성형 인공지능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전력 소비의 폭증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곧 탄소 발자국의 폭증으로 이어졌다.18 자원 소비의 급증과 행성 자원의 고갈이라는 곤란한 문제는 ‘알고리즘 통치성’ 시대의 통제 기관이 가장 은폐하고 싶어하는 문제 중 하나다. 눈앞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테크놀로지의 신비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리튬과 희토류 광물이 채굴되며, 광물 정제 과정에서 방사능 폐기물이 산출되고, 유독한 디지털 쓰레기들이 제3세계의 어느 땅에 버려진다. 데이터 서버의 냉각을 위해 하루 수백만 톤의 물이 소비되고,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디지털 기술은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기술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사실 지구의 지질학적 자원과 역사를 물리적으로 소모하고 있는 물질적인 기술이다.19 〈Coagulation〉에서 사용된 환영 이미지의 제작 방법은 행성적 자원 소비에 동참하지 않기 위해서 선택된 대안이다. 동시에 이는 몰입적 스크린에 새로이 발생한 뒷면을 지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갈되고 있는 행성이라는 실재다. 다시 한번 몰입은 몰입 이면의 것을 인식하게끔 하고, 실재를 엿볼 수 있는 틈새를 연다.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는, ‘그것’을 마주치기 위한 미세한 이질감(들). 그런 이질감이 전시 《Contrology》를 가로지른다.
4. 최후의 환영 장치
《Contrology》가 기술을 다루는 입장은 꽤나 양가적이다. 전시는 기술 내에 존재하는, 환영적인, 그러나 철저히 은폐되어 있는 측면을 소리 높여 폭로하기보다는 짐짓 그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방법을 택한다. 이때 올라탐이란 기술의 문제적인 일방통행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제스처라기보다는 그 위에서 꾸준하게 균형을 잡는 일이며, 나아가 기술의 힘과 흐름을 역이용해 감각과 인식을 재배치하려는 운동이 된다. 전시는 환영과 비판 사이에서, 서두에서 인용한 세르와 크래리의 언어를 빌려 오자면, 각성과 잠듦 사이에서 조용히 몸을 긴장시키며 외줄 타기한다. 이는 곧 우리를 둘러싼 기술의 풍경이 얼마나 착취적이고, 환영적이고, 또 유독하든, 여기서 온전히 탈출하는 사변은 얼마간 허위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 몸짓이다.
기술의 유익함과 유독함, 그 분리 불가능한 양면적 성격을 이른바 ‘파르마콘’ 개념을 빌어 보충할 수 있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 1952-2020)는 인류학자 앙드레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의 성찰을 따라, 인간은 기술적 도구나 언어와 같은 필연적 인공물을 통해 그 자신을 외재화하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진화함과 동시에 기술적으로도 진화하는데, 이때 기술적 인공물은 비유기적이지만 유기화된 체외기관, 일종의 외재화된 팔다리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술은 제거 불가능한 생물학적 필연이다. 인간은 결여된 신체를 인공물을 이용해 보완한다. 따라서 디지털 자동화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기술이 하나의 임계점을 넘어 치명적인 유독성을 뿜어내며 가속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약이자 동시에 독을 의미하는 ‘파르마콘-논리’를 바탕으로 치료 가능성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비관론, 혹은 낙관론이라는 단일한 출구를 찾기보다는 시간 속에서 약과 독의 비율을 조정하며 기술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20
구기정은 전시 내내 삐걱거리는 몸과 눈의 움직임을 조장하며 기술과 신체의 매개를 재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전시는 ‘파르마콘-논리’로서의 기술을 감각할 수 있는 임시적 장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경험하기 위하여 관객이 환영과 속임수 속으로 훌쩍 뛰어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분명 공교로운 문턱을 형성한다. 환영을 통한 비판, 속임수를 통한 해방이라는, 여러모로 모순적인 지점들. 그렇다면 여기서 마지막으로 물어야 하는 것은, 《Contrology》가 어떠한 비판적 물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 아니라, ‘환영이 정말로 정상 작동하고 있었는가?’라는 기술적 문제일지 모른다. 전시에 존재하는 환영은, 미세한 이질감을 불어 넣는 딜레마 장치들은, 진짜로 누군가를 속일 수 있었을까?
나의 경험을 복기해볼 차례다. 2층에 놓인 작업이었던 〈당신의 손가락은 누구의 명령을 수행합니까?〉(2022)를 볼 때였다. 작가가 직접 등장해 인터뷰하는 단순한 구성의 영상이었다. 전시에 놓인 3점의 작업 중 하나였고, 그만큼 꽤 중요한 내용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내용은 조금 따분했다. 기술에 관하여, 인간과 비인간에 관하여, 대형 컨퍼런스의 모두발언 같은 적당한 발화가 이어졌다. 무미건조하고 심심한 질문과 답변이 과연 의도적인 것일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영상이 끝나고 엔드 크레딧이 올랐다. 크레딧에는 순전하고 따분한 저 말의 출처가 적혀 있었다. 인터뷰에서 작가가 말한 답변은 전부 인공지능 언어 모델을 이용해 작성된 것이었다. 나는 속아 넘어갔다.
〈당신의 손가락은 누구의 명령을 수행합니까?〉에서 작가는 인공지능 언어 모델의 꼭두각시 역할을 자처한다. 전시가 진행된 시점은 오픈AI(OpenAI)의 챗GPT(ChatGPT)가 출시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인공지능이 도출한 대답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무감한 것이었다. 생기 없는 문장을 줄줄 읊는 작가의 모습은 다소간 부자연스러웠고 어색했으며, 나아가 이질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언어를 경유해 인공지능 두뇌를 장착한 채 인터뷰에 임한 작가의 신체는,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이질감을 기입했다. 어쩌면 심화되어가는 기술의 일방적인 가속 안에서도, 여전히 가장 강력한 환영의 기능을 행사하는 것은 인간 신체라는 껍데기의 몫이다.
여기서 다시 앞선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각성 혹은 잠듦. 낙관론 혹은 비관론. 어디로 가야 할까?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지식의 정지된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역의 사이 지점을 질주하는 틈새의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Contrology》는 다양한 방식의 ‘조절학’을 연출한다. 전시는 병든 현대 사회에게서 벗어나 건강함을 되찾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인 ‘조절학’을 디지털 미디어 테크놀로지 내부에서 신체와 지식을 재인식하기 위한 모종의 방법으로 확장한다. 여기에는 어떤 역산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기술이 신체의 체외기관이라면, 신체에 노이즈를 부과함으로써 기술의 통제를 자극하고, 나아가 변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어쩌면 신체야말로 우리가 가장 망각하기 쉬운 기술, 최초이자 최후의 보철물이자 환영 장치다. 일상에서 잊힌 몸을 되새기기 위해서는 간단한 동작부터 시작해야 한다. 숨을 들이쉬고 뱉고, 몸을 늘였다 줄이고, ‘조절(control)’하기 위한 의식적 운동이 필요하다.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움직일 수 있는 부분과 움직일 수 없는 부분이 느껴지고, 신체 내부에 처음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확고한 이질성을 찾아낼 수 있다. 이와 같은 감각적 성찰을 체외기관, 즉 기술로 확장해보자. 《Contrology》는 이질감이 하나의 공생자처럼 언제나 그곳에 있는 무엇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며, 신체와 기술이 매개된 틈새를 천천히 감각할 것을 권유한다. 중요한 것은 일단 그것을 찾아내는 일이다. 블랙박스화된 자동화 사회의 어두컴컴한 통제 속에서,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많은 것이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비평 : 황재민
아주 미세한 이질감의 배치 – 《Contrology》라는 조절학
1. 각성 혹은 잠듦
파리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Paris), 혹은 그냥 드니(Denis)라고 불리는 성인이 있다. 그는 약 3세기쯤 생존한 인물로, 고대 로마 시기에 루테티아(Lutetia), 지금은 파리로 불리는 곳에서 포교 활동을 펼치다 박해받았다. 드니 성인은 참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기적이 벌어졌다. 그가 잘려 나간 자기 머리를 양손에 들고 일어나 걸었던 것이다. 드니 성인은 이 기적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랐고 이후 여러 성상에서 머리를 양손에 들고 있는 특유의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미셸 세르(Michel Serres, 1930-2019)는 디지털 미디어가 보편화된 오늘날을 드니 성인의 시대라고 칭한다. 그러니까,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젊은 세대’는, 곧 자신의 머리를 양손에 든 변조된 신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머리가 어깨 위에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양손 위에 있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세르는 변조된 신체를 가진 스마트폰 세대가 기적적인 시대를 일궈낼 것이라 말한다. 그들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혼돈을 만들어낼 것이며, 이윽고 지식 시대의 종말을 이끌어내리라고 말이다. 머리 없는 익명의 드니 성인(들)은 머리 있는 자들이 설계했던 지식 생산의 기반 조건을 재배치할 것이며, 혁명을 조직하고 완전히 새로운 정치 쟁의를 개발해낼 것이며, 마침내 “군대에 평화를 선사한다.”1 그들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통치성을 분쇄하고, 수면제 중독에 시달리며 잠들어 있던 자들을 각성시킨다.2
조금 황당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낙관론은 스마트폰 세대가 갈수록 퇴화하는 인류사의 말단이라는 냉소주의에 적극적으로 맞선다. 스마트폰 세대와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양식이 아무리 멍청하고 난잡하게 보이더라도, 그건 기껏해야 ‘머리 있는 자’들의 시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식 생산과 정보 처리의 주권이 어깨 위 머리로부터 양손으로 재배치되는 순간, 통제 사회(the Societies of Control)로부터 탈주선을 그릴 수 있는 지식의 재배치 역시 동반된다. 그렇지 않겠는가? 아직 낙담은 이르다.
세르의 활기찬 서술에 있어, 각성은 중요한 모티브다. 그러나 각성으로부터 느닷없는 혁명의 가능성이 아닌, 음울하리만치 비관적인 뒷면을 읽어내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 이를테면 조너선 크래리(Jonathan Crary, 1951-)는 각성 상태가 잠듦의 미명을 벗어나는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동시대인이 항구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유독한 일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24시간 내내 통신망을 경유해 연결되어 있고, 삶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와 장소가 디지털 이미지 혹은 정보 등으로 기록되고 저장되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비-시간이 삶의 모든 국면을 잠식한 뒤, 어떠한 정보도 생산하지 않을 수 있는 여분의 시간, 휴식과 잠의 시간은 무용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평가절하 당한다. 전자화된 삶이 강요하는 빠른 속도는 계속해서 불면을 권유하고, 이는 곧 내적 자아의 절대적인 침묵으로 이어진다. 세르와는 달리, 크래리는 항구적인 각성 상태와 강제적인 불면으로부터 지각 경험의 동질화/동기화(synchronization), 인간 경험의 표준화, 또한 주체적 동일성 및 특이성의 상실을 짚어낸다.3 이때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각성이 아니라 잠듦이다. 불면과 각성을 주입하는 파국적 시대의 바깥을 상상하기 위해, 꿈을 배양할 수 있는 급진적 단절로서의 잠듦이 필요하다.4
세르와 크래리의 상이한 시대 인식은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불투명한 이행기에 주어지는 모순된 주석이다. 하나의 시대를 바탕으로 한 이토록 양가적인 펼침면은 ‘오늘’을 틀짓고 사유하는 것이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거한다. 각성인가, 혹은 잠듦인가? 무기력한 미명 속을 시급히 벗어나야 하는가, 혹은 어둠 속에 머무르며 상상과 감각을 회복할 수 있는 일시 정지 상태를 찾아야 하는가? 정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전시전경 《Contrology》(2022)
2. 장치의 ‘조절학(Contrology)’
구기정의 전시, 《Contrology》(2022)는 미디어 환경의 변환과 그에 따른 인간 신체 및 정신의 변환을 추적한다. 전시에는 총 3개의 작업이 놓였고, 전부 스크린이 포함되어 있었다. 개 중 〈Contrology〉(2022), 그리고 〈Coagulation〉(2022)과 같은 작업에는 스크린과 함께 구조물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 장치는 작업 내부로 진입한 관객의 신체가 움직이게끔 강제하고, 동시에 그 움직임의 가동 범위를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Contrology》는 스크린과 인간이 맺는 물질적 조건을 임의적으로 조작하며 관객의 신체를 의도치 못한 방향으로 유동시키는데, 이것은 ‘오늘’의 미디어 환경이 작동하는 비가시적 통제의 양상을 모사하는 듯했다.
기술은 망각을 자신의 원리 중 하나로 갖는다. 이를테면, 스마트폰 사용자 중 매 순간 디바이스의 무게를 구체적으로 감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망각이라는 조건은 사용자와 모순적인 관계를 맺는다. 정작 기술 그 자체는 투명한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용자가 기술 장치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망각할 때, 그는 장치 이면에서 작동하는 모종의 이데올로기를 수행하게 된다. 이를테면 크래리가 말했듯이, “테크놀로지적 인터페이스가 편재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사용자들이 더 능수능란하고 숙련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분투하도록 이끈다.”5 그렇다면 인간이 스크린과 맺는 접면의 물질적 조건을 재사유하는 것은, ‘오늘’의 추적을 위해 긴요하다. 《Contrology》의 경우에서처럼.
그러나 여기엔 아직 해소되지 않은 모순점이 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미디어는 성공적으로 제작될수록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만다. 이때 스크린과 인간의 관계를 자의적으로 매개한다는 것은, 어쩌면 장치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의 환영을 단순히 재생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지속적으로 은폐되는 기술의 환영적 성격을 끄집어내어 성찰하기 위해선, 내부의 재조직이 아닌 외부의 침입이 필요한 것 아닐까? 그러나 《Contrology》의 장치들은, 미디어의 테크놀로지적 인터페이스가 갖는 환영적 성격을 적극 수행하는 한편, 동시에 아주 미세한 이질감을 기입하는 양가적인 역할을 한다. 전시에서, 관객은 공간에 놓인 구조물에 몸을 맡기고, 스크린을 체험하며, 모종의 불편함과 이질감을 천천히 감각하게 된다. 이 이질감은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인식과 감각의 향방을 재조정한다. 전시는 인간이 스크린 바깥으로 완전히 탈출하거나, 스크린 내부로 완전히 사라지는 종류의 사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인간이 스크린과 맺는 필연적 매개를 직시하고 나아가 재사유하기를 권한다. 온전한 각성, 혹은 온전한 잠듦이라는 극단의 선택지 중 한 축으로 기울어지기보다는 양가적 선택지를 포괄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한다.
〈Contrology〉(2022)
〈Coagulation〉(2022)
〈Coagulation〉(2022)
3. 〈Contrology〉와 〈Coagulation〉의 경우: 미세한 이질감의 배치
그렇다면 작업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전시된 작업은 무엇보다도 ‘잘’ 만들어져 있는데, 스테인리스 구조물의 글로시한 표면, 연극 무대처럼 감각적으로 조절된 조도, 그리고 스크린의 말끔한 물성 등이 합쳐져 그런 인상을 준다. 언뜻 보면 SF 영화의 세트장이라거나 혹은 (그것이 무슨 제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 출시된 제품의 시연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설치는 보는 이가 마음을 놓고 장치에 신체를 내맡기게 하는 외적 요소가 된다.
〈Contrology〉의 경우, 구성은 다음과 같다. 2개의 커브드 모니터가 아래로 살짝 기울어진 채 설치되었고, 곡선으로 휘어진 스테인리스 구조물이 모니터를 지지하고 있다. 스크린, 그러니까 모니터를 보기 위해서 관객은 이 구조물에 앉아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뭔가 문제가 발생한다. 구조물이 애매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고, 또 조금 딱딱하기 때문에, 자리에 앉은 관객은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비뚤어지게 되는 것이다. 〈Contrology〉는 분명 즐거운 안락함이 아니라 불편함과 이질감을 주고 있는데, 그 와중 스크린에서는 퍼포머가 등장, 구조물을 이용해 능숙하게 몸을 이완하고 운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크린 속 퍼포머가 구조물을 활용하는 숙련된 모습은 관객이 구조물이 맺고 있는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와는 상이하다. 몸을 편하게 쉴 수 없는 이질적 환경 속에서, 관객은 매끄럽고 일상적인 몰입의 상태를 체험하는 게 아니라 특정 구조물 위에 위치 지어져 있는 자신의 상태를 계속해서 되새기게 된다.
전시와 작업의 공통 제목인 “컨트롤로지(Contrology)”에는 단서가 있다. 전시 서문에 따르면, “컨트롤로지”는 필라테스 운동의 창시자 조셉 필라테스(Joseph Hubertus Pilates, 1883-1967)가 명명한 개념이다.6 조셉 필라테스는 이 “컨트롤로지”, 즉 ‘조절학’을 통해, “문명인의 자질인 몸과 마음의 완전한 균형”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질병과 불행이란 정글”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근육 운동을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나아가 습관을 조절하여, 완벽한 신체와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7
조셉 필라테스는 이와 같은 ‘조절학’을 1차 세계 대전 당시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에 체류 중이었던 그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수감 되었는데, 수감 상태에서 건강을 돌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던 중 수용소 침대 등을 이용한 운동 방법을 생각했고, 이는 곧 필라테스라는 운동법의 바탕이 되었다.8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은 《Contrology》라는 전시/작업의 이름에 흥미로운 뉘앙스를 덧댄다. 수용소, 그러니까 감옥과 같은 규율 기관이 정신, 나아가 신체를 통치하던 규율 사회(disciplinary societies)의 끄트머리에서, 조셉 필라테스는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 조절과 수양의 방법을 창시해냈다. 그렇다면 규율 사회 이후, 컴퓨터라는 기계가 보편화된 이후의 통제 사회에서, 자기 조절과 수양은 어떤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여기서 잠시 통제 사회라는 시대 구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1990년 발표한 짧은 글 「통제 사회에 대하여(les sociétés de contrôle)」에서, “제3의 기계들, 즉 정보 기기와 컴퓨터 등을 통하여 작동”하는 통제 사회가 규율 사회를 대체하며 등장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통제 사회는 “변조(modulation), 즉 순간순간 스스로 변하는 주형, 혹은 이리저리 변형될 수 있는 그물과 같은 것”으로, “암호와 같은 숫자”들에 의해 작동하며 포괄적이고 초안정적으로 공존하는 “한없는 지연”을 만들어낸다. 이 지연 속에서 인간은 무한한 순환을 통해 철저하게 나누어지며, ‘우리’로의 집산이 불가능해진다.9
들뢰즈의 선구적인 통찰은 정보 기기가 컴퓨터 이상으로 확장되어버린 오늘날에도 얼마간 유효하다. 특히 “암호와 같은 숫자들”,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 1943-2011)가 모든 차원을 영차원으로 압축해버리는 실재계의 연산 기술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했던 디지털 미디어 특유의 정보 처리 능력에 대한 성찰은 특히 필요하다.10 이제 동시대인은 이른바 ‘알고리즘 통치성(algorthmic governmentality)’의 시대, 삶과 사회적 관계가 모두 연산 가능한 코드로 전환되어 전적으로 데이터화된 시대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데이터화된 ‘자기’들이 알고리즘의 블랙박스 안에 밀폐되어버린다는 점, 체화된(embodied) 개인의 실존하는 잠재성이 연산 과정에서 실종되어버리는 동안 오직 통계화된 개인만이 주체로 기능하기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11 오늘날 유일한 집산은 통계적 집산일 따름이고, 이는 측정 불가능한 무엇으로 여겨지는 인간 고유의 감각, 신체 등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시 한번 크래리를 인용하자면, 그는 테크놀로지 인터페이스와 알고리즘의 개입 이후 인간의 눈이 광학의 영역에서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안구”라는 용어는 인간의 시각을 외부의 지시나 자극에 종속될 수 있는 운동 활동으로 재배치한다.” 이제 눈은, “전자적 유인에 대한 신체 운동 반응이 그 최종 결과가 되는 어떤 회로의 매개요소로 변환된다.”12 과거 인간의 눈이 세계를 감각하는 자율적 기관으로써 판단의 기능을 수행했다면, 오늘날 눈이란 포착한 시각 이미지를 전산 회로에 연산 가능한 형태로 기입하기 위한 미가공 데이터의 생산 장치가 된다. 여기선 오직 연산 가능한 신체만이 신체라고 불릴 수 있으며, 연산 가능한 움직임만이 움직임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이와 같은 배경을 고려한 채 〈Contrology〉, 그리고 작업에 내재된 미세한 이질감을 떠올려보는 것은 흥미롭다. 〈Contrology〉는 스크린 앞에 놓인 신체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행동,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는 모범적 행동으로부터 빗겨날 수 있는 움직임을 기획한다. 〈Contrology〉는 예외적 움직임의 산출을 통해 관객의 신체를 교란하는데, 이것은 동시에 신체 움직임을 채집하려는 전자 회로를 교란하는 움직임이며, 신체를 하나의 변수로 전환하여 연산 불가능한 움직임을 생산하려는 탐구다. 작업은 미세하고 내재적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신체에 예외적 움직임을 기입하며 새로운 ‘조절학’의 가능성을 그린다. 그것은 몸과 마음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건강한 움직임이 아니라, 예외적이고 단절적인 불균형을 도모하기 위해 신체의 잠재성을 복원하려는 이질적인 움직임이다.
그러나 〈Contrology〉에 가까이 놓인 〈Coagulation〉로 향하자면, 의문이 생겨난다. 여기서부터 신체의 움직임과 그 가능성이 돌연 사라진 탓이다. ‘응고’를 뜻하는 〈Coagulation〉에서 관객은 움직이기를 멈추고, 곡선형 스테인리스 구조물에 가만히 기대어 스크린을 바라볼 것을 권유받는다. 꽤 크게 펼쳐진 스크린 앞에는 풀과 흙이 원형으로 깔려 있고, 관객은 구조물 위에 걸터앉거나 등을 기대며 앉는 등, 비교적 편안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마침 눈앞의 스크린에서는 숲, 바위, 이끼, 혹은 이 모든 것이거나 그 어떤 것도 아닌 이미지가 끊임없이 움직이며 영사되고 있기에, 〈Coagulation〉에서는 마치 정원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그러므로 위험한 몰입의 장소를 경험할 수 있다.
어떤 맥락에서 살펴보나, 몰입으로부터 비판을 찾아내긴 어렵다. 몰입은 연극, 영화, TV, 그리고 가상현실까지, 매체가 전환되고 발전해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인간적’ 관성이다. 소파에 앉아 스크린의 불빛을 멍하니 쳐다보는 누군가 혹은 길거리를 거닐며 시야를 스마트폰에 고정시킨 누군가를 떠올려 본다. 몰입은 수동적인 것, 나아가 무기력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전시는 〈Coagulation〉에 가정된 바라봄의 상태를 ‘몰입-딜레마’라고 규정한다. 스크린에서 유동하고 있는 이미지는 사실 혼동을 일으키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작가는 〈Coagulation〉에서, “실존하는 이미지인지 혹은 디지털로 생산된 이미지인지에 대한 교란”, 그리고 “이미지를 아주 느리게 동작시키며 (…) 의심하는 시선과 의심을 거두기 위한 집중”,13 이와 같은 두 가지 요소를 염두에 두었다고 말한 바 있다. 〈Contrology〉가 신체의 움직임에 미세한 이질감을 기입하고자 했다면, 〈Coagulation〉는 안구의 작용과 이미지의 인식에 미세한 이질감을 기입한다.
‘몰입-딜레마’의 구현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이라면, 아마도 딜레마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몰입 상태를 요구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딜레마의 모순적 상태가 과연 몰입을 이겨낼 수 있을까? 몰입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 아닐까? 그러나 여기서 ‘몰입-딜레마’의 필요 조건으로 주어진 몰입 상태를, 앞서 말한 잠듦, 통제 사회의 “한없는 지연”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급진적인 단절로서의 잠듦과 겹쳐볼 수 있을 것이다. 몰입은 무비판적인 유희의 상태인 동시에,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상태, 집중하는 상태, 결과적으로 (언젠가 완전히 잊어버릴지라도) 이미지에 대해 더 잘 아는 상태를 유도하기도 한다. 끝없는 몰입은 무기력의 미명 속으로 계속해서 침잠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어쩌면 이미지의 보다 정치한 파악을 가능케 하는 잉여 시간의 형성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이를테면 미디어 이론가 텅-후이 후(Tung-Hui hu)는 끝없이 스마트폰을 붙잡고 몰입하는 ‘무기력증(lethargy)’ 상태를 하나의 단절적 힘으로 재사유하고자 했다. 그는 계속되는 스크롤링으로 마비되어 버린 신체와 정신을 병리적 상태로 간주하는 대신, 창조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거대한 잠재성의 영역이자 디지털 자본주의(digital capitalism)가 투여하는 주체화의 서사를 끊어낼 수 있는 부정성의 힘으로 치환할 것을 제안한다.14 〈Coagulation〉 역시 몰입을 단순히 소모적인 시간이 아닌, 이질성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잠재적 시간으로 향하는 문턱으로 다룬다. 이것은 또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Coagulation〉의 딜레마에 대해, 한 겹의 맥락을 덧붙일 수 있다. 작가는 〈Coagulation〉에서 “실존하는 이미지인지 디지털로 생산된 이미지인지”15 혼동되는, 자연의 것인지 인공의 것인지 판단하기 까다로운 이미지를 제작했다. 이 이미지는 화면 속에서 멈춤 없이 유동하면서 몰입을 유도했는데, 언뜻 보면 생성적 인공지능(generative AI)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렌더링 중인 망델브로 집합적 자연, “실재계를 디지털화하는 상징적 구조를 연산”16한 결과처럼 보였다. 그러나 〈Coagulation〉의 이미지는 실제 자연을 촬영한 뒤 3D 모델링을 거쳐 변형한 것으로, 이와 같은 제작법은 이미지의 정체에 대한 혼동을 만드는 환영적 기술이기도 했다. 다만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작가는 생성적 인공지능을 활용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며 전력 소비의 문제를 거론했는데, 인공지능을 구동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전력이 소비되기에 이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17 여기서 〈Coagulation〉의 이미지 제작 방식은 단순히 효율성을 고려한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작업의 방법론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로 취급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여러 취재에 따르면, 생성형 인공지능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전력 소비의 폭증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곧 탄소 발자국의 폭증으로 이어졌다.18 자원 소비의 급증과 행성 자원의 고갈이라는 곤란한 문제는 ‘알고리즘 통치성’ 시대의 통제 기관이 가장 은폐하고 싶어하는 문제 중 하나다. 눈앞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테크놀로지의 신비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리튬과 희토류 광물이 채굴되며, 광물 정제 과정에서 방사능 폐기물이 산출되고, 유독한 디지털 쓰레기들이 제3세계의 어느 땅에 버려진다. 데이터 서버의 냉각을 위해 하루 수백만 톤의 물이 소비되고,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디지털 기술은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기술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사실 지구의 지질학적 자원과 역사를 물리적으로 소모하고 있는 물질적인 기술이다.19 〈Coagulation〉에서 사용된 환영 이미지의 제작 방법은 행성적 자원 소비에 동참하지 않기 위해서 선택된 대안이다. 동시에 이는 몰입적 스크린에 새로이 발생한 뒷면을 지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갈되고 있는 행성이라는 실재다. 다시 한번 몰입은 몰입 이면의 것을 인식하게끔 하고, 실재를 엿볼 수 있는 틈새를 연다.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는, ‘그것’을 마주치기 위한 미세한 이질감(들). 그런 이질감이 전시 《Contrology》를 가로지른다.
4. 최후의 환영 장치
《Contrology》가 기술을 다루는 입장은 꽤나 양가적이다. 전시는 기술 내에 존재하는, 환영적인, 그러나 철저히 은폐되어 있는 측면을 소리 높여 폭로하기보다는 짐짓 그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방법을 택한다. 이때 올라탐이란 기술의 문제적인 일방통행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제스처라기보다는 그 위에서 꾸준하게 균형을 잡는 일이며, 나아가 기술의 힘과 흐름을 역이용해 감각과 인식을 재배치하려는 운동이 된다. 전시는 환영과 비판 사이에서, 서두에서 인용한 세르와 크래리의 언어를 빌려 오자면, 각성과 잠듦 사이에서 조용히 몸을 긴장시키며 외줄 타기한다. 이는 곧 우리를 둘러싼 기술의 풍경이 얼마나 착취적이고, 환영적이고, 또 유독하든, 여기서 온전히 탈출하는 사변은 얼마간 허위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 몸짓이다.
기술의 유익함과 유독함, 그 분리 불가능한 양면적 성격을 이른바 ‘파르마콘’ 개념을 빌어 보충할 수 있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 1952-2020)는 인류학자 앙드레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의 성찰을 따라, 인간은 기술적 도구나 언어와 같은 필연적 인공물을 통해 그 자신을 외재화하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진화함과 동시에 기술적으로도 진화하는데, 이때 기술적 인공물은 비유기적이지만 유기화된 체외기관, 일종의 외재화된 팔다리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술은 제거 불가능한 생물학적 필연이다. 인간은 결여된 신체를 인공물을 이용해 보완한다. 따라서 디지털 자동화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기술이 하나의 임계점을 넘어 치명적인 유독성을 뿜어내며 가속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약이자 동시에 독을 의미하는 ‘파르마콘-논리’를 바탕으로 치료 가능성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비관론, 혹은 낙관론이라는 단일한 출구를 찾기보다는 시간 속에서 약과 독의 비율을 조정하며 기술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20
구기정은 전시 내내 삐걱거리는 몸과 눈의 움직임을 조장하며 기술과 신체의 매개를 재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전시는 ‘파르마콘-논리’로서의 기술을 감각할 수 있는 임시적 장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경험하기 위하여 관객이 환영과 속임수 속으로 훌쩍 뛰어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분명 공교로운 문턱을 형성한다. 환영을 통한 비판, 속임수를 통한 해방이라는, 여러모로 모순적인 지점들. 그렇다면 여기서 마지막으로 물어야 하는 것은, 《Contrology》가 어떠한 비판적 물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 아니라, ‘환영이 정말로 정상 작동하고 있었는가?’라는 기술적 문제일지 모른다. 전시에 존재하는 환영은, 미세한 이질감을 불어 넣는 딜레마 장치들은, 진짜로 누군가를 속일 수 있었을까?
나의 경험을 복기해볼 차례다. 2층에 놓인 작업이었던 〈당신의 손가락은 누구의 명령을 수행합니까?〉(2022)를 볼 때였다. 작가가 직접 등장해 인터뷰하는 단순한 구성의 영상이었다. 전시에 놓인 3점의 작업 중 하나였고, 그만큼 꽤 중요한 내용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내용은 조금 따분했다. 기술에 관하여, 인간과 비인간에 관하여, 대형 컨퍼런스의 모두발언 같은 적당한 발화가 이어졌다. 무미건조하고 심심한 질문과 답변이 과연 의도적인 것일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영상이 끝나고 엔드 크레딧이 올랐다. 크레딧에는 순전하고 따분한 저 말의 출처가 적혀 있었다. 인터뷰에서 작가가 말한 답변은 전부 인공지능 언어 모델을 이용해 작성된 것이었다. 나는 속아 넘어갔다.
〈당신의 손가락은 누구의 명령을 수행합니까?〉(2022)
〈당신의 손가락은 누구의 명령을 수행합니까?〉에서 작가는 인공지능 언어 모델의 꼭두각시 역할을 자처한다. 전시가 진행된 시점은 오픈AI(OpenAI)의 챗GPT(ChatGPT)가 출시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인공지능이 도출한 대답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무감한 것이었다. 생기 없는 문장을 줄줄 읊는 작가의 모습은 다소간 부자연스러웠고 어색했으며, 나아가 이질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언어를 경유해 인공지능 두뇌를 장착한 채 인터뷰에 임한 작가의 신체는,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이질감을 기입했다. 어쩌면 심화되어가는 기술의 일방적인 가속 안에서도, 여전히 가장 강력한 환영의 기능을 행사하는 것은 인간 신체라는 껍데기의 몫이다.
여기서 다시 앞선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각성 혹은 잠듦. 낙관론 혹은 비관론. 어디로 가야 할까?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지식의 정지된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역의 사이 지점을 질주하는 틈새의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Contrology》는 다양한 방식의 ‘조절학’을 연출한다. 전시는 병든 현대 사회에게서 벗어나 건강함을 되찾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인 ‘조절학’을 디지털 미디어 테크놀로지 내부에서 신체와 지식을 재인식하기 위한 모종의 방법으로 확장한다. 여기에는 어떤 역산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기술이 신체의 체외기관이라면, 신체에 노이즈를 부과함으로써 기술의 통제를 자극하고, 나아가 변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어쩌면 신체야말로 우리가 가장 망각하기 쉬운 기술, 최초이자 최후의 보철물이자 환영 장치다. 일상에서 잊힌 몸을 되새기기 위해서는 간단한 동작부터 시작해야 한다. 숨을 들이쉬고 뱉고, 몸을 늘였다 줄이고, ‘조절(control)’하기 위한 의식적 운동이 필요하다.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움직일 수 있는 부분과 움직일 수 없는 부분이 느껴지고, 신체 내부에 처음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확고한 이질성을 찾아낼 수 있다. 이와 같은 감각적 성찰을 체외기관, 즉 기술로 확장해보자. 《Contrology》는 이질감이 하나의 공생자처럼 언제나 그곳에 있는 무엇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며, 신체와 기술이 매개된 틈새를 천천히 감각할 것을 권유한다. 중요한 것은 일단 그것을 찾아내는 일이다. 블랙박스화된 자동화 사회의 어두컴컴한 통제 속에서,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많은 것이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1미셸 세르, 『엄지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2014, 99쪽.
2미셸 세르, 같은 책, 133쪽.
3조너선 크래리,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옮김, 문학동네, 2014, 86-87쪽.
4조너선 크래리, 같은 책, 200쪽.
5조너선 크래리, 같은 책, 97쪽.
6이지언, 「Access-Control-Allow-Origin」, 2022, 페이지 표기 없음.
7 조셉 필라테스, 『필라테스 바이블』, 저드 로빈스, 린 반 휴트-로빈스 엮음, 원정희 옮김, 판미동, 2020, 35쪽, 64쪽.
8 필라테스 파운데이션의 설명을 참조했다. https://www.pilatesfoundation.com/pilates/the-history-of-pilates/, 2023년 3월 15일 접속.
9질 들뢰즈, 『대담 1972-1990』, 김종호 옮김, 솔출판사, 1994, 198-205쪽.
10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윤원화 옮김, 현실문화, 2011, 346쪽.
11존 체니-리폴드, 『우리는 데이터다』, 배현석 옮김, 한울, 2021, 172-175쪽.
12조너선 크래리, 같은 책, 122-123쪽.
13이지언, 〈Coagulation〉 작업 설명, 페이지 표기 없음, 2022.
14Tung-Hui Hu, Digital Lethargy, MIT Press, 2022, 23-24pp.
15이지언, 〈Coagulation〉 작업 설명, 페이지 표기 없음, 2022.
16프리드리히 키틀러, 같은 책, 348쪽.
17작가와의 대화로부터 발췌, 2022년 11월 26일, Hall1.
18Chris Stokel-Walker, "The Generative AI Race Has a Dirty Secret", WIRED UK, https://www.wired.co.uk/article/the-generative-ai-search-race-has-a-dirty-secret, 2023, 2023년 3월 22일 접속.
19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53-59쪽.
20김재희, 「스티글레르를 통해 본 정보기술의 파르마콘적 의미와 돌봄으로서의 앎」, 『탈경계인문학』 14, no. 2, 2021, 34-38쪽.
스티글레르는 파르마콘 개념을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로부터 빌어 온다. 데리다는 문자를 말의 의미와 진리를 보존할 수 있는 약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해석의 위험 속에서 진리를 훼손할 수 있는 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자가 말의 가능 조건이면서 동시에 불가능 조건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파르마콘이라고 지칭했는데, 스티글레르는 이와 같은 통찰을 확장하여 문자로 대표되는 기억기술 자체의 조건으로 사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