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비평워크숍
글 : 조주리* (전시기획, 미술평론)
구기정의 렌더링 ≥ 월드 =%세GyeSe계세계Saegye
구기정이 오늘날의 디지털 이미지 메이커들이 구사하는 보편적 접근과 특수 효과를 두루 활용하고 있지만 그간의 작업을 이펙트 차원에서 논의하거나, 미디어 아트로 두루뭉술 획정1(劃定)하는 일은 어쩐지 무신경하다 느껴진다. 그것이 배치되고, 병치되는 방식에 따라 구기정의 작업은 완결된 화면이자, 다른 무엇인가를 위한 하부의 디지털 소스이며, 빛과 사운드를 내장한 물질 덩어리이자, 관람하는 신체의 반경을 주조한 경험 디자인의 산물이다. 최근 몇 년간 제작된 작업에 대한 의도와 자기언술이 명징함에도 불구하고, 구기정의 작업은 이미지의 생산과 수용에 관한 다양한 질문과 함의를 파생시킨다. 구기정이 고민하는 지점은 기술이 매개하는 이미지와 신체, 그리고 생태 환경을 포괄하는 물리적 세계와의 관계적 차원에 복잡성을 증대시키는 것에 있어 보인다.
원본 사진을 기반으로 디지털적 변형을 가하는 자연의 이미지는 사실적 재현을 목표로 하거나, 반대로 독해 불가능한 허구성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급조된 용어이긴 하지만, 구기정이 생성해낸 일련의 이미지 앞에 ‘포스트(post)' 라는 수사를 별다른 의심없이 적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반드시 조작과 변형에 관계된 디지털 이미지의 제작적 측면만을 뜻하는 바는 아니다. 이미지를 감각하는 주체가 지닌 분별과 분할 그리고 통합의 측면까지 고려한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구기정의 작업으로부터 간취할만한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지 제작 과정의 특수성에 있지 않고, 그것이 수용되고 독해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설계했다는 점에 있다. 그 과정이 고도화된 디지털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 또한 흥미롭게 살펴볼 필요는 있다. 인터넷을 떠도는 값싼 이미지를 구하거나 스톡 이미지를 구매하는 대신, 초고해상도의 매크로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본과 그것을 전문적인 스킬로 렌더링 하는 구기정의 제작 방식은 오히려 의도된 ‘크래프트(craft)’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평면에서 입체로, 스틸 이미지에서 무빙 이미지로 변환되는 동안 생생한 결감과 깊이감이라는 환영을 부여하기 위해 컴퓨터 프로그램이 수행하는 이미지의 보간과 증강 기능을 지시하면서도, 그 결과물이 전형적 이미지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모순을 동반한다. 작가의 영악한 의도에 따라,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좁다란 틈새를 벌리는 일은 작고 야트막한 이물감이면 충분해 보인다. 실감나는 스펙터클 앞에서 우리의 할일은 야트막한 틈새와 가짜 솔기를 찾아내는 일이다. 파편적으로 구성된 화면을 이리저리 꿰어 하나로 보거나, 그 자체로 감상할 수 있는 기계적 시야각을 훈련해 볼 수도 있다. 렌더링된 이미지는 실제보다 더 박진감 넘칠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이미지를 떠 내어 눈 앞으로 다시 옮겨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수축과 팽창의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보는 행위가 자율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드러난 단면을 다겹의 눈으로 응시해본다. 구기정이 만들어 낸 일련의 풍경들은 자연스럽고 구체적인 듯 보이지만 동시에 인조적이며 모호하다. 망막을 사로잡는 놀라운 핍진성에도 불구하고 방금 전 보았던 것의 실체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찜찜함 섞인 모호함이 남는다. 기분의 실체는 매끈해 보이는 것 사이에 깃든 약간의 조잡함,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이 발산하는 불편함 같은 것이다. 이 세계 어디에도 접속되지 않는 모조적인 감각이 일찌감치 들켜버렸다면 구기정의 계산법에 미세한 오류가 있었던 것일테고, 마지막까지 이상한 데가 없다 느꼈다면 누군가는 약간 둔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우리가 사는 세계 마디 마디에 깊숙히 스며든 이미지의 허구성이 가진 강력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작업을 둘러싼 다양한 허구와 착오의 지점들을 여러 각도에서 점검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작업을 통해 기술되어 온 논점과 전시를 통해서 발화된 효과를 교차 검증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디지털 이미지 전반에 내장된 미세한 틈새를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의도적으로 통합해내는 일이야 말로 이미지 간의 착종으로 점철된 세계를 바라보는 해상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구기정의 작업이 국내에서 소구되기 시작한 시점을 살펴보면 2020년 전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스위스 체류 기간 동안 실험했던 다양한 습작들이 코로나 시기 동안 양적으로나 규모 면에서 가시적으로 팽창된 것처럼 보이는데, 미술을 비롯한 삶 전반의 것들을 화면으로 접촉하고 이미지로 소통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구기정의 작업방식이 갖는 장점을 발견하게 된다. 제작 방식을 단순하게 이해하자면, 실재하는 자연 풍경을 특수 촬영하여, 이를 다시 디지털적으로 재구성하고 가공하여 그 결과물을 프린트와 영상, 복합 설치의 형식으로 변주해 온 셈이다. 매해 꾸준한 기세로 이어져 온 자연 연작을 큰 틀에서 보자면, 각각의 작업이 모여 하나의 ‘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우리가 자연 환경 전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일종의 도식화된 시각적 틀과 실재의 차이를 반복하여 드러내고 있다. 원시 대자연과 문명화된 개인의 몸이 공존하는 현대사회에서 그 격차를 가장 밀접하게 중개하거나, 반대로 차이를 벌리는 것은 카메라와 출력물, 다양한 투사 기기, VR과 같은 디지털 증강장치이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을 하는 것이 익숙한 편인 구기정에게 일하는 신체와 일체화된 기기와의 연결성, 반대로 환경과의 분절성은 일상의 조건인 셈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코로나 시기 동안 자연과 식물을 다룬 다양한 이미지 실험과 설치 양식이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 비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을 다양한 자연종과 사물을 통해 사유하고자 하는 작가주의적 흐름이 인류세 담론과 함께 신유물론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대두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구기정의 작업을 시대의 흐름에 조응하는 하나의 사례로 받아들이는 것도 얼마 간은 유효할테지만, 작업의 쟁점을 조금 더 뾰족하게 다듬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인간의 신체와 감각기관 내부에 깊이 침윤된 디지털 감각에 대한 놀라움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러한 감각이 재편하는 세계에 대한 像을 곡해없이 살펴보고, 공백의 지점을 자체적으로 보간하고, 통합된 부분을 미분하여 인지하는 일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시각적 허상에 속고, 때로 그 당연함을 적극적으로 수긍하고, 부분적으로 필터링하는 일에 관한 문제다.
작가는 일관되게 그의 작업의 표제로써 장면(Scenes), 풍경(Landscape), 영토(Realm), 자연(Nature)을 공간형 모듈로 상정하고, 그 앞에 다시 “초과된"(Exceed), “합성된”(Synthetic), “매크로(Macro)”와 같은 수사를 더함으로써 그것이 오늘날 자연의 초상이자 물질의 현실임을 직설적인 방식으로 반영해 왔다. 초과된 자연을 묘사하는 법은 오직 초과된 기술을 통해, 합성된 자연을 보여주는 일은 오직 합성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은 일견 정직한 대응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고장난 해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업을 통해 마주한 토양과 대지의 단면, 이끼와 풀의 숨구멍, 미생물에 가까워 보이는 것들의 진동은 지나친 자세함으로 인한 불친절에 수렴하며, 생명이 발산하는 활달함보다는 그 반대편의 과잉 운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들이 구기정이 세계를 응시하고 보여주고 싶은 의도된 렌더링 방식이다.
그러나 지금껏 자연, 인간, 기술을 둘러싼 복합적 관계항을 여러 시각 언어로 다루는 작가들이 셀 수 없이 많고, 오늘날의 사회문화 담론 안에서도 여전히 가장 첨예한 주제이다. 그 속에서 구기정 작업이 점하는 변별성 내지는 독자성이 어디에 있을까, 오늘날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시각성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이어진다. 작가가 그간의 작업을 통해 부분적으로 디지털 자연과 디지털(화된) 신체, 아날로그 자연과 아날로그 신체의 축을 서로 번갈아 이어가며 도달한 중간 결론이 있다면, 아마도 각자의 데이터와 살결들이 현실의 어느 곳에서든 서로 이어지거나 중첩되어 궁극적으로는 서로 구분 불가능한 상태임을 발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일종의 시각적 분투를 해온 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일종의 작가적 렌더링으로 칭하고 싶다. 오늘날 손쉽게 접근 가능한 용어 중 하나인 ‘Render’는 무엇인가를 다른 상태로 만든다는 포괄적 의미를 가진다. 가령, 악보를 음악으로 이행시키는 연주자의 실행 과정, 원재료를 가공하여 다른 형태로 전환하는 기술 (가령, 고체에서 분말로), 그리고 마지막 영상 출력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편집 파일의 효과- 음영, 색상, 재질 등을 계산하여 통합하는 과정을 지칭하기도 한다. 구기정과, 그의 카메라와, 그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함께 렌더링 해낸 세계는 실재와 다름이 극명한데, 다만 이미지가 실재보다 점점 비대해지고 있는 지금의 세계에서 그것이 무슨 문제일지, 혹은 문제가 아닐지 생각해보자. 작가가 펼쳐낸 화면 안에서 방향의 방향, 깊이의 깊이, 강도의 강도 같은 것들이 서로 갈라지고 합쳐져서 어떤 상을 만들어 내는 동안, 화면 바깥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멀 수 있고, 자연이 들리는 것보다 야트막할 수 있고, 사람이 만져지는 것보다 가벼울 수 있음을 기억하자. 화면은 세계의 거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쑥날쑥 렌더링된 세계의 레이어를 낱낱이 해체하여 다시 렌더링 걸 수 있는 최후의 주최는 결국 자신일 수 밖에 없기에. 그것이 각자의 거울이자, 세계를 컨트롤하는 렌더링 방식일 것이다.
글 : 조주리* (전시기획, 미술평론)
구기정의 렌더링 ≥ 월드 =%세GyeSe계세계Saegye
구기정이 오늘날의 디지털 이미지 메이커들이 구사하는 보편적 접근과 특수 효과를 두루 활용하고 있지만 그간의 작업을 이펙트 차원에서 논의하거나, 미디어 아트로 두루뭉술 획정1(劃定)하는 일은 어쩐지 무신경하다 느껴진다. 그것이 배치되고, 병치되는 방식에 따라 구기정의 작업은 완결된 화면이자, 다른 무엇인가를 위한 하부의 디지털 소스이며, 빛과 사운드를 내장한 물질 덩어리이자, 관람하는 신체의 반경을 주조한 경험 디자인의 산물이다. 최근 몇 년간 제작된 작업에 대한 의도와 자기언술이 명징함에도 불구하고, 구기정의 작업은 이미지의 생산과 수용에 관한 다양한 질문과 함의를 파생시킨다. 구기정이 고민하는 지점은 기술이 매개하는 이미지와 신체, 그리고 생태 환경을 포괄하는 물리적 세계와의 관계적 차원에 복잡성을 증대시키는 것에 있어 보인다.
원본 사진을 기반으로 디지털적 변형을 가하는 자연의 이미지는 사실적 재현을 목표로 하거나, 반대로 독해 불가능한 허구성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급조된 용어이긴 하지만, 구기정이 생성해낸 일련의 이미지 앞에 ‘포스트(post)' 라는 수사를 별다른 의심없이 적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반드시 조작과 변형에 관계된 디지털 이미지의 제작적 측면만을 뜻하는 바는 아니다. 이미지를 감각하는 주체가 지닌 분별과 분할 그리고 통합의 측면까지 고려한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구기정의 작업으로부터 간취할만한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지 제작 과정의 특수성에 있지 않고, 그것이 수용되고 독해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설계했다는 점에 있다. 그 과정이 고도화된 디지털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 또한 흥미롭게 살펴볼 필요는 있다. 인터넷을 떠도는 값싼 이미지를 구하거나 스톡 이미지를 구매하는 대신, 초고해상도의 매크로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본과 그것을 전문적인 스킬로 렌더링 하는 구기정의 제작 방식은 오히려 의도된 ‘크래프트(craft)’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평면에서 입체로, 스틸 이미지에서 무빙 이미지로 변환되는 동안 생생한 결감과 깊이감이라는 환영을 부여하기 위해 컴퓨터 프로그램이 수행하는 이미지의 보간과 증강 기능을 지시하면서도, 그 결과물이 전형적 이미지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모순을 동반한다. 작가의 영악한 의도에 따라,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좁다란 틈새를 벌리는 일은 작고 야트막한 이물감이면 충분해 보인다. 실감나는 스펙터클 앞에서 우리의 할일은 야트막한 틈새와 가짜 솔기를 찾아내는 일이다. 파편적으로 구성된 화면을 이리저리 꿰어 하나로 보거나, 그 자체로 감상할 수 있는 기계적 시야각을 훈련해 볼 수도 있다. 렌더링된 이미지는 실제보다 더 박진감 넘칠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이미지를 떠 내어 눈 앞으로 다시 옮겨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수축과 팽창의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보는 행위가 자율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드러난 단면을 다겹의 눈으로 응시해본다. 구기정이 만들어 낸 일련의 풍경들은 자연스럽고 구체적인 듯 보이지만 동시에 인조적이며 모호하다. 망막을 사로잡는 놀라운 핍진성에도 불구하고 방금 전 보았던 것의 실체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찜찜함 섞인 모호함이 남는다. 기분의 실체는 매끈해 보이는 것 사이에 깃든 약간의 조잡함,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이 발산하는 불편함 같은 것이다. 이 세계 어디에도 접속되지 않는 모조적인 감각이 일찌감치 들켜버렸다면 구기정의 계산법에 미세한 오류가 있었던 것일테고, 마지막까지 이상한 데가 없다 느꼈다면 누군가는 약간 둔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우리가 사는 세계 마디 마디에 깊숙히 스며든 이미지의 허구성이 가진 강력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작업을 둘러싼 다양한 허구와 착오의 지점들을 여러 각도에서 점검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작업을 통해 기술되어 온 논점과 전시를 통해서 발화된 효과를 교차 검증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디지털 이미지 전반에 내장된 미세한 틈새를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의도적으로 통합해내는 일이야 말로 이미지 간의 착종으로 점철된 세계를 바라보는 해상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구기정의 작업이 국내에서 소구되기 시작한 시점을 살펴보면 2020년 전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스위스 체류 기간 동안 실험했던 다양한 습작들이 코로나 시기 동안 양적으로나 규모 면에서 가시적으로 팽창된 것처럼 보이는데, 미술을 비롯한 삶 전반의 것들을 화면으로 접촉하고 이미지로 소통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구기정의 작업방식이 갖는 장점을 발견하게 된다. 제작 방식을 단순하게 이해하자면, 실재하는 자연 풍경을 특수 촬영하여, 이를 다시 디지털적으로 재구성하고 가공하여 그 결과물을 프린트와 영상, 복합 설치의 형식으로 변주해 온 셈이다. 매해 꾸준한 기세로 이어져 온 자연 연작을 큰 틀에서 보자면, 각각의 작업이 모여 하나의 ‘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우리가 자연 환경 전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일종의 도식화된 시각적 틀과 실재의 차이를 반복하여 드러내고 있다. 원시 대자연과 문명화된 개인의 몸이 공존하는 현대사회에서 그 격차를 가장 밀접하게 중개하거나, 반대로 차이를 벌리는 것은 카메라와 출력물, 다양한 투사 기기, VR과 같은 디지털 증강장치이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을 하는 것이 익숙한 편인 구기정에게 일하는 신체와 일체화된 기기와의 연결성, 반대로 환경과의 분절성은 일상의 조건인 셈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코로나 시기 동안 자연과 식물을 다룬 다양한 이미지 실험과 설치 양식이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 비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을 다양한 자연종과 사물을 통해 사유하고자 하는 작가주의적 흐름이 인류세 담론과 함께 신유물론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대두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구기정의 작업을 시대의 흐름에 조응하는 하나의 사례로 받아들이는 것도 얼마 간은 유효할테지만, 작업의 쟁점을 조금 더 뾰족하게 다듬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인간의 신체와 감각기관 내부에 깊이 침윤된 디지털 감각에 대한 놀라움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러한 감각이 재편하는 세계에 대한 像을 곡해없이 살펴보고, 공백의 지점을 자체적으로 보간하고, 통합된 부분을 미분하여 인지하는 일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시각적 허상에 속고, 때로 그 당연함을 적극적으로 수긍하고, 부분적으로 필터링하는 일에 관한 문제다.
작가는 일관되게 그의 작업의 표제로써 장면(Scenes), 풍경(Landscape), 영토(Realm), 자연(Nature)을 공간형 모듈로 상정하고, 그 앞에 다시 “초과된"(Exceed), “합성된”(Synthetic), “매크로(Macro)”와 같은 수사를 더함으로써 그것이 오늘날 자연의 초상이자 물질의 현실임을 직설적인 방식으로 반영해 왔다. 초과된 자연을 묘사하는 법은 오직 초과된 기술을 통해, 합성된 자연을 보여주는 일은 오직 합성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은 일견 정직한 대응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고장난 해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업을 통해 마주한 토양과 대지의 단면, 이끼와 풀의 숨구멍, 미생물에 가까워 보이는 것들의 진동은 지나친 자세함으로 인한 불친절에 수렴하며, 생명이 발산하는 활달함보다는 그 반대편의 과잉 운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들이 구기정이 세계를 응시하고 보여주고 싶은 의도된 렌더링 방식이다.
그러나 지금껏 자연, 인간, 기술을 둘러싼 복합적 관계항을 여러 시각 언어로 다루는 작가들이 셀 수 없이 많고, 오늘날의 사회문화 담론 안에서도 여전히 가장 첨예한 주제이다. 그 속에서 구기정 작업이 점하는 변별성 내지는 독자성이 어디에 있을까, 오늘날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시각성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이어진다. 작가가 그간의 작업을 통해 부분적으로 디지털 자연과 디지털(화된) 신체, 아날로그 자연과 아날로그 신체의 축을 서로 번갈아 이어가며 도달한 중간 결론이 있다면, 아마도 각자의 데이터와 살결들이 현실의 어느 곳에서든 서로 이어지거나 중첩되어 궁극적으로는 서로 구분 불가능한 상태임을 발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일종의 시각적 분투를 해온 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일종의 작가적 렌더링으로 칭하고 싶다. 오늘날 손쉽게 접근 가능한 용어 중 하나인 ‘Render’는 무엇인가를 다른 상태로 만든다는 포괄적 의미를 가진다. 가령, 악보를 음악으로 이행시키는 연주자의 실행 과정, 원재료를 가공하여 다른 형태로 전환하는 기술 (가령, 고체에서 분말로), 그리고 마지막 영상 출력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편집 파일의 효과- 음영, 색상, 재질 등을 계산하여 통합하는 과정을 지칭하기도 한다. 구기정과, 그의 카메라와, 그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함께 렌더링 해낸 세계는 실재와 다름이 극명한데, 다만 이미지가 실재보다 점점 비대해지고 있는 지금의 세계에서 그것이 무슨 문제일지, 혹은 문제가 아닐지 생각해보자. 작가가 펼쳐낸 화면 안에서 방향의 방향, 깊이의 깊이, 강도의 강도 같은 것들이 서로 갈라지고 합쳐져서 어떤 상을 만들어 내는 동안, 화면 바깥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멀 수 있고, 자연이 들리는 것보다 야트막할 수 있고, 사람이 만져지는 것보다 가벼울 수 있음을 기억하자. 화면은 세계의 거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쑥날쑥 렌더링된 세계의 레이어를 낱낱이 해체하여 다시 렌더링 걸 수 있는 최후의 주최는 결국 자신일 수 밖에 없기에. 그것이 각자의 거울이자, 세계를 컨트롤하는 렌더링 방식일 것이다.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다양한 성격의 전시 프로그램을 만들고 글을 쓴다. 더불어, 기업 및 기관 컨설팅, 외주 연구와 기획을 통해 공공 기관의 의제에 조력하기도 한다. 일련의 프로그램을 통해 전시 매체가 지켜온 양식적 특질과 서사방식을 재점검하고, 작품을 생산, 배치하는 과정에서 관성화된 일부분을 변경/와해시키는 일에 일관된 흥미를 느껴왔다. 동시대 미술 제도의 특수성과 공명하는 예술적 지식과 미적 발언을 지지하지만, 약간의 비판적 마음을 유지하며 작가들과 대화하고, 전시의 전후를 살피며, 필요한 대응과 제안을 해나가고 있다.
1경계 따위를 명확히 구별하여 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