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정의 초과된 디깅과 (불)가능한 해부
오정은(미술비평)
“이것은 인간의 힘을 초월한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도록 선고된 사람이 그것을 한다.”
〓
무언가 사라진다. 지층에 퇴적되어 존재를 이루었던 바들이 하나둘, 가속적으로 삭제된다. 감각의 뿌리로 세계를 지탱하던 자취가 희미해진다. 침잠하듯 안으로 깊이 파고들거나, 공기 중으로 증발한 뒤 결국 보이지 않게 된다. 오랜 시간 현전으로 믿어온 것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는 외부의 소실이 아니라 내부의 실종이다. 겉은 점점 선명해지지만, 그럴수록 안은 아득해진다. 보이는 이미지는 무한히 증식하지만, 실재는 정작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인류세’라는 이름은 바로 이 사라짐의 현상을 일부 명명한다. 티모시 모턴의 『어두운 생태학(Dark Ecology)』이 말하듯, 우리는 존재하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자연을 마주하고 있다. 개발과 구축의 과잉이 아니라, 사라지고 잃어가는 휘발 속에서 새로움을 포착한다.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인식하며, 지질학적 깊이로 탐사를 확장한다. 박테리아, 곰팡이, 무생물에 깃든 그림자 같은 움직임을 추적하고 경계를 더듬는다. 외부와 내부의 막을 뚫고, 은닉된 실재를 찾아 사유를 이어간다. 사물은 심오하게 물러난(withdrawn) 방식으로 현존하며 서로 원격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자각한다. 객체들은 마치 데이터의 잔여처럼, 전송과 변환의 회로 위를 부유해간다.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채, 관계의 안팎을 스치며 흩어진다.
동시대 미술은 첨단 기술을 예술의 미디어로 적극 수용하면서도, 지구 위기에 대한 자성적 담론을 병행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자연과학의 경계에서 인간과 기술, 그리고 환경은 분리된 차원이 아닌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 상태로 출현한다. 구기정(b.1990)은 그 같은 풍경을 번역하는 작가로 주목받는다. 그는 주변에 있는 ‘존재 아래의 존재’를 탐색하고 그를 광학으로 구현하며, 지금의 낯선 감각을 재구성한다.
로잔예술대학교(ECAL) 유학 시절 발표한 New Machine(2018)은 인체의 장기를 상상하며 3D 스캐닝과 스컬핑 기술을 활용해 제작된 컬러풀한 라이브포토였다. 이후 그는 신체의 특정한 통증과 자극을 옮긴 디지털 영상 Douleur(2018), Body Stimuli(2019), 근육을 재조절하는 필라테스에 영감을 받은 영상 및 스테인리스 조각 Contrology(2022), Facing and Strolling(2023)을 통해 몸 안의 감각을 가시화하는 데 골몰했다.
한편 〈자연은 파란색이다〉(2018), 〈랜더링 된 자연〉(2019), 〈응고〉(2019), 〈유명한 풍경〉(2021), 〈초과된 풍경〉(2021-, 연작), 〈미세기계생명배양장치〉(2024-, 연작)은 스위스와 한국의 나무숲, 땅속과 같은 실제 자연을 포착한 대표작들이다. 이들은 고해상도 카메라와 매크로 렌즈, 디스플레이먼트 맵 등의 기술을 통해, 세계의 삭제된 형태를 보존하고 재연산한다. 이미지의 표면 아래로 어두운 생태의 질서가 복제·변형·렌더링·증강의 언어로 호출되며 그래픽적으로 발광한다.
구기정의 수행은 일상성을 벗어난 초현실적 보기와 연동된다. 그의 미디어는 사실과 왜곡을 오가며,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동시에 가로지른다. 그 속에서 생성된 이미지들은 실체를 가지지만, 그렇다고 그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지도 않는다. 〈물은 투명하다〉(2021) 영상에 삽입된 자막, “눈은 표면 아래에 감춰진 깊고 고요한 공간을 살펴본다”는 문장은 이 역설을 단적으로 예견한다. 작업 특유의 고배율 해상도가 보여주는 것은 진실의 단순한 확대가 아니라, 여전히 볼 수 없는 패러독스의 형상이다. 관객은 이러한 이미지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느린 속도로 흐르는 영상의 물결을 관조한다. 진단하자면, 이는 하이데거가 언급한 객체존재성(Vorhandenheit) 상태와 닮아 있다. 구기정의 화면은 객체화된 세계를 뚜렷하게 응시하면서도, 그 ‘초과된’ 시선을 통해 관계와 감각의 내면적 층위로 복귀하기를 희망한다.
“가치의 본질은 가치가 있는 지점에 있다.
가치는 눈이 고정되어 있는 그 곳을 의미한다.”
〓
앞면이 투명한 타워형 큐브 안에 LED 모니터가 내장된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깊은 곳〉(2023)을 보자. 이 스테인리스 구조물 안에는 폴리카보네이트와 보존 이끼, 인조식물도 함께 들어가 있다. 화면은 초근접 자연의 무빙 이미지를 상영하며, 전체는 하나의 디지털 테라리엄으로서 작가의 세계관을 압축하여 보인다. 이 설치는 이종의 객체들이 겹쳐진 하나의 레이어이며, 동시에 무한에 가까운 층위들의 합이다. 다양한 생물과 무생물 종이 공존하며, 실재와 가상이 촉발한 작은 입자와 유선형의 줄기들이 얽히고설켜 각자의 속도로 유동한다. 여러 형태의 조각들이 떠 있는 것 같기도, 뿌리처럼 아래로 뻗어 묻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구기정은 그것을 일렬로 배열하지 않고, 중첩된 레이어의 상태 자체로 드러낸다. 관객은 그것의 단면만 볼 뿐, 복잡하게 분포된 그들 전체에 접근할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초객체(hyperobject)의 사유가 드러난다. 초객체는 시공간에 대량으로 미치는 매우 거대한 현상으로,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나 실체를 온전히 알기도 어려운 것이다.
구기정이 대상을 시각화하는 방법론은 일종의 ‘해부’에 가깝다. 이는 죽은 것을 부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 그대로 해부하는 ‘디깅(digging)’의 방법론이다. 그에 의해 파헤쳐진 상처는 전자적 글리치로 치환되고, 분출된 혈액은 화면 속 액상으로 스며든다. 왜곡과 변동 속에서 겉과 안, 실재와 비실재의 균형이 뒤섞이며, 잠복해 있던 감각이 신경절처럼 점멸하며 깨어난다. 그것은 한동안 배제되어 있던 것이거나, 처리할 수 없이 묻혀 있던 심연일 수도 있다. 이는 조르주 바타유가 말하는 ‘이종(hetero)'의 개념과 맞닿는다. 바타유는 사유의 기초를 동화될 수 없는 것들, 떨어져 나가 버려진 모든 것에 두고자 했다. 구기정의 화면 속에서 이러한 이질성은 기술적 매개를 통해 다시 감각의 층위로 되돌아온다. 기계와 생물, 물질과 이미지, 유기적 잔여와 전자적 흔적이 한데 엉켜 서로의 경계와 한계를 침투한다. 그로써 뒤섞인 감각은 잠복과 발화 속에 죽음과 생동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취한다.
〈투명성 렌더링 장치〉(2025), 〈투명성 시각장치〉(2025-, 연작)는 이렇게 해체된 존재의 현전을 보여준다. 구기정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조를 동시에 드러내는 장치”로 설명한 이들은 유리막, 전자기판, 3D 렌더링 프로그램의 메인 창, 매크로 출력된 사진의 파편들이 라이트 패널 안에 병치된 작업이다. 각각의 사물과 이미지는 겹쳐진 레이어로서 나타나고, LED의 일정한 밝기 속에서 서로의 윤곽을 포개며 유기적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기계 장치와 제작 과정이 작품의 실제 구동 부품이자 현실의 구체적 증거로 드러난다는 특징이 있다. 신작 〈클리어뷰 메커니즘〉(2025)에서 이러한 특징은 한층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작업창의 메뉴바, ‘Made in Korea’ 같은 제조 표기, 상품화된 부품의 일련번호, 파일 정보 및 시스템 로그가 ‘작동하는 실체’로 나타나고 있다. 절단된 코드의 조각, 뒤엉켜 금이 간 회로, 그 틈새를 비집고 돋아나는 식물의 형상, 방출되는 잡음이 서로를 침투하며, 살아 있는 유기체와 전자적 잔해의 경계를 허문다. 기계의 내부에서 태동한 생명, 혹은 생명처럼 보이는 전자적 환영이 교차하며, 노출된 실제 전기선과 더불어 작품 전체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상태를 증언한다. 구기정에게 ‘투명성’은 균열과 누출, 잉여와 오류가 뒤섞인 총합된 상태이자 자기 작업의 프로세스를 흔적기관에 투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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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구기정의 작업이 동시대 미술의 유행 담론으로 소비되며 정합되어온 측면에서 볼 때, 그 밖의 노동과 잉여를 드러내는 예외적 시도로 읽힌다. 잔해에 관한 바타유의 궤를 다시금 소환하는 이것은 미술관이라는 제도 안에서 완결된 작품으로 멈추던 형식을 넘어, 미술을 환기하고 주의를 해체할 징조를 품는다. 이것은 어떤 성공이나 혁명을 간취하지는 않는다. 사라지고 숨어 탈락했던 바들을 찾아 파고들며 그들을 노출하고 관계망을 상상할 뿐이다. 그렇게 누락된 정보, 불명의 감각,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무엇이 해부대에 오른다. 초과된 잔여의 심도 속에서 존재를 해부하는 구기정의 가능/불가능한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오정은(미술비평)
“이것은 인간의 힘을 초월한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도록 선고된 사람이 그것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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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사라진다. 지층에 퇴적되어 존재를 이루었던 바들이 하나둘, 가속적으로 삭제된다. 감각의 뿌리로 세계를 지탱하던 자취가 희미해진다. 침잠하듯 안으로 깊이 파고들거나, 공기 중으로 증발한 뒤 결국 보이지 않게 된다. 오랜 시간 현전으로 믿어온 것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는 외부의 소실이 아니라 내부의 실종이다. 겉은 점점 선명해지지만, 그럴수록 안은 아득해진다. 보이는 이미지는 무한히 증식하지만, 실재는 정작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인류세’라는 이름은 바로 이 사라짐의 현상을 일부 명명한다. 티모시 모턴의 『어두운 생태학(Dark Ecology)』이 말하듯, 우리는 존재하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자연을 마주하고 있다. 개발과 구축의 과잉이 아니라, 사라지고 잃어가는 휘발 속에서 새로움을 포착한다.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인식하며, 지질학적 깊이로 탐사를 확장한다. 박테리아, 곰팡이, 무생물에 깃든 그림자 같은 움직임을 추적하고 경계를 더듬는다. 외부와 내부의 막을 뚫고, 은닉된 실재를 찾아 사유를 이어간다. 사물은 심오하게 물러난(withdrawn) 방식으로 현존하며 서로 원격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자각한다. 객체들은 마치 데이터의 잔여처럼, 전송과 변환의 회로 위를 부유해간다.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채, 관계의 안팎을 스치며 흩어진다.
동시대 미술은 첨단 기술을 예술의 미디어로 적극 수용하면서도, 지구 위기에 대한 자성적 담론을 병행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자연과학의 경계에서 인간과 기술, 그리고 환경은 분리된 차원이 아닌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 상태로 출현한다. 구기정(b.1990)은 그 같은 풍경을 번역하는 작가로 주목받는다. 그는 주변에 있는 ‘존재 아래의 존재’를 탐색하고 그를 광학으로 구현하며, 지금의 낯선 감각을 재구성한다.
로잔예술대학교(ECAL) 유학 시절 발표한 New Machine(2018)은 인체의 장기를 상상하며 3D 스캐닝과 스컬핑 기술을 활용해 제작된 컬러풀한 라이브포토였다. 이후 그는 신체의 특정한 통증과 자극을 옮긴 디지털 영상 Douleur(2018), Body Stimuli(2019), 근육을 재조절하는 필라테스에 영감을 받은 영상 및 스테인리스 조각 Contrology(2022), Facing and Strolling(2023)을 통해 몸 안의 감각을 가시화하는 데 골몰했다.
한편 〈자연은 파란색이다〉(2018), 〈랜더링 된 자연〉(2019), 〈응고〉(2019), 〈유명한 풍경〉(2021), 〈초과된 풍경〉(2021-, 연작), 〈미세기계생명배양장치〉(2024-, 연작)은 스위스와 한국의 나무숲, 땅속과 같은 실제 자연을 포착한 대표작들이다. 이들은 고해상도 카메라와 매크로 렌즈, 디스플레이먼트 맵 등의 기술을 통해, 세계의 삭제된 형태를 보존하고 재연산한다. 이미지의 표면 아래로 어두운 생태의 질서가 복제·변형·렌더링·증강의 언어로 호출되며 그래픽적으로 발광한다.
구기정의 수행은 일상성을 벗어난 초현실적 보기와 연동된다. 그의 미디어는 사실과 왜곡을 오가며,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동시에 가로지른다. 그 속에서 생성된 이미지들은 실체를 가지지만, 그렇다고 그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지도 않는다. 〈물은 투명하다〉(2021) 영상에 삽입된 자막, “눈은 표면 아래에 감춰진 깊고 고요한 공간을 살펴본다”는 문장은 이 역설을 단적으로 예견한다. 작업 특유의 고배율 해상도가 보여주는 것은 진실의 단순한 확대가 아니라, 여전히 볼 수 없는 패러독스의 형상이다. 관객은 이러한 이미지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느린 속도로 흐르는 영상의 물결을 관조한다. 진단하자면, 이는 하이데거가 언급한 객체존재성(Vorhandenheit) 상태와 닮아 있다. 구기정의 화면은 객체화된 세계를 뚜렷하게 응시하면서도, 그 ‘초과된’ 시선을 통해 관계와 감각의 내면적 층위로 복귀하기를 희망한다.
“가치의 본질은 가치가 있는 지점에 있다.
가치는 눈이 고정되어 있는 그 곳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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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이 투명한 타워형 큐브 안에 LED 모니터가 내장된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깊은 곳〉(2023)을 보자. 이 스테인리스 구조물 안에는 폴리카보네이트와 보존 이끼, 인조식물도 함께 들어가 있다. 화면은 초근접 자연의 무빙 이미지를 상영하며, 전체는 하나의 디지털 테라리엄으로서 작가의 세계관을 압축하여 보인다. 이 설치는 이종의 객체들이 겹쳐진 하나의 레이어이며, 동시에 무한에 가까운 층위들의 합이다. 다양한 생물과 무생물 종이 공존하며, 실재와 가상이 촉발한 작은 입자와 유선형의 줄기들이 얽히고설켜 각자의 속도로 유동한다. 여러 형태의 조각들이 떠 있는 것 같기도, 뿌리처럼 아래로 뻗어 묻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구기정은 그것을 일렬로 배열하지 않고, 중첩된 레이어의 상태 자체로 드러낸다. 관객은 그것의 단면만 볼 뿐, 복잡하게 분포된 그들 전체에 접근할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초객체(hyperobject)의 사유가 드러난다. 초객체는 시공간에 대량으로 미치는 매우 거대한 현상으로,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나 실체를 온전히 알기도 어려운 것이다.
구기정이 대상을 시각화하는 방법론은 일종의 ‘해부’에 가깝다. 이는 죽은 것을 부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 그대로 해부하는 ‘디깅(digging)’의 방법론이다. 그에 의해 파헤쳐진 상처는 전자적 글리치로 치환되고, 분출된 혈액은 화면 속 액상으로 스며든다. 왜곡과 변동 속에서 겉과 안, 실재와 비실재의 균형이 뒤섞이며, 잠복해 있던 감각이 신경절처럼 점멸하며 깨어난다. 그것은 한동안 배제되어 있던 것이거나, 처리할 수 없이 묻혀 있던 심연일 수도 있다. 이는 조르주 바타유가 말하는 ‘이종(hetero)'의 개념과 맞닿는다. 바타유는 사유의 기초를 동화될 수 없는 것들, 떨어져 나가 버려진 모든 것에 두고자 했다. 구기정의 화면 속에서 이러한 이질성은 기술적 매개를 통해 다시 감각의 층위로 되돌아온다. 기계와 생물, 물질과 이미지, 유기적 잔여와 전자적 흔적이 한데 엉켜 서로의 경계와 한계를 침투한다. 그로써 뒤섞인 감각은 잠복과 발화 속에 죽음과 생동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취한다.
〈투명성 렌더링 장치〉(2025), 〈투명성 시각장치〉(2025-, 연작)는 이렇게 해체된 존재의 현전을 보여준다. 구기정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조를 동시에 드러내는 장치”로 설명한 이들은 유리막, 전자기판, 3D 렌더링 프로그램의 메인 창, 매크로 출력된 사진의 파편들이 라이트 패널 안에 병치된 작업이다. 각각의 사물과 이미지는 겹쳐진 레이어로서 나타나고, LED의 일정한 밝기 속에서 서로의 윤곽을 포개며 유기적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기계 장치와 제작 과정이 작품의 실제 구동 부품이자 현실의 구체적 증거로 드러난다는 특징이 있다. 신작 〈클리어뷰 메커니즘〉(2025)에서 이러한 특징은 한층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작업창의 메뉴바, ‘Made in Korea’ 같은 제조 표기, 상품화된 부품의 일련번호, 파일 정보 및 시스템 로그가 ‘작동하는 실체’로 나타나고 있다. 절단된 코드의 조각, 뒤엉켜 금이 간 회로, 그 틈새를 비집고 돋아나는 식물의 형상, 방출되는 잡음이 서로를 침투하며, 살아 있는 유기체와 전자적 잔해의 경계를 허문다. 기계의 내부에서 태동한 생명, 혹은 생명처럼 보이는 전자적 환영이 교차하며, 노출된 실제 전기선과 더불어 작품 전체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상태를 증언한다. 구기정에게 ‘투명성’은 균열과 누출, 잉여와 오류가 뒤섞인 총합된 상태이자 자기 작업의 프로세스를 흔적기관에 투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구기정의 작업이 동시대 미술의 유행 담론으로 소비되며 정합되어온 측면에서 볼 때, 그 밖의 노동과 잉여를 드러내는 예외적 시도로 읽힌다. 잔해에 관한 바타유의 궤를 다시금 소환하는 이것은 미술관이라는 제도 안에서 완결된 작품으로 멈추던 형식을 넘어, 미술을 환기하고 주의를 해체할 징조를 품는다. 이것은 어떤 성공이나 혁명을 간취하지는 않는다. 사라지고 숨어 탈락했던 바들을 찾아 파고들며 그들을 노출하고 관계망을 상상할 뿐이다. 그렇게 누락된 정보, 불명의 감각,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무엇이 해부대에 오른다. 초과된 잔여의 심도 속에서 존재를 해부하는 구기정의 가능/불가능한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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